한국소소설문학대계 연속리뷰, 제 6권, 염상섭의 무화과 감상문 되겠습니다.
지난 번에 읽었던 ‘삼대’, 와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입니다. 인물의 설정이나 환경이나 줄거리나 묘사나, 모든 면에 있어서 ‘삼대의 변주’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습니다만 일단 ‘삼대’ 이야기는 접어 두고 이 작품에 대한 것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작품은 읽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진행은 느리고 설명은 자세하며 지루한 편입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드라마틱하게 집중되는 구성도 아닙니다. 단지 그 시대의 물결을 고스란히 받으며 살아가고 흥왕하고 몰락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삼익사라는 회사를 할아버지에게서 (개차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물려받은 소위 ‘재벌 3세’ 이원영이라는 인물이 부실 신문사를 사탕발림에 넘어가 거의 떠안다시피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원영은 제대로 배운 인텔리이자 사려깊은 가장이며 무위도식하지 않으려는 건실한 청년이기도 합니다. 그의 누이 이문영은 한인호라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과 결혼하여 일본에서 그림을 배우는 학생이고요. 이원영과 어린 시절 정혼한 사이였다가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결국 기생이 되어버린 채련-그녀는 나중에 이원영의 첩이 되지요-과 신문사의 소위 모던 인텔리 기자 아가씨 박종엽 등이 당시의 여인상을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박종엽 같은 경우는 요새 식으로 따져도 꽤 나대는 아가씨입니다^^ 그리고 이원영 가문을 여러 가지로 등쳐먹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기꾼이자 여러 사람들에게 입 하나로 갖은 시비를 붙인 협잡질의 대가 김홍근이 등장하죠. 읽다보면 '조놈의 조동아리를 째버리고 싶은'생각이 계속 치밀어오를 정도의 인물이더군요. 이들과 주변을 둘러싼 인간군상이 다채롭게 어우러지며 이야기를 끌어나갑니다.
염상섭은 소위 가진 자들의 천박함을 경멸했던 것 같고, 없는 자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었던듯 합니다. 하지만 그가 카프 문학 계열로 흘러가지 않았던 건 아마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 기인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게 인간이다, 원래 인간의 바닥이란 이렇게 추잡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그의 문학의 깊이는 이런 전제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요. 그에게 구름잡는 이상주의는 없었습니다.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 천박하다 싶을 정도로 돈에 휘둘립니다. 이원영이라는 인물 하나를 어떻게든 갉아먹으려고 하나같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나, 김홍근이나, 한인호나... 구역질이 날 지경입니다. 사람들이 어째 이래 소리가 나올정도로 몰염치하고 뻔뻔하죠. 이원영의 선한 의도는 무참해지고 가산만 탕진하는 꼴이 됩니다. 선의로 동생 친구 조정애의 학비를 대 주었다가 그녀가 사회주의 활동을 하는 바람에 그 자신까지 감옥신세를 지기도 합니다. 결국 원영의 집안은 몰락해버리고 그는 다시 수감생활을 하게 될 상황에 처하고 말죠.
원영의 동생 문영은 철모르는 귀부인입니다. 돈은 벌 줄 모르고 쓸 줄만 아는. 그녀는 순전히 편하게 살 만한 신랑감을 골라잡아 결혼을 했으나 그 집안에서는 대놓고 큰돈을 요구하고 결국 그녀가 바람이 났다는 핑계로 이혼으로 내몰립니다. 이혼을 한다는 말로 위협을 하며 돈을 뜯어내려는 거였지요. 문영이 김봉익이라는 남자를 속으로 좋아하긴 했지만 손 한번 안 잡아본 사람하고 바람이라니 하하.. 그러다가 남편 한인호가 진짜 바람난 걸 문영에게 정통으로 걸려 버리지요...그런데도 이혼해주는데 돈 내놓으라고 껄떡거리질 않나. 돈을 뜯어내려면 그런 방법을 쓰면 안 되지 남편놈아...사돈 어르신들아. 그녀 역시 남겨진 돈 일만 원을 아버지에게 뜯기고, 사기꾼같은 김홍근에게 뜯기고 합니다.
'무화과'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추잡하고 속물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에 맞서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장대한 서사입니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 누구든 이 두 가지 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꽃이 피어날 수 없던 시대의 아들, 무화과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인생을 살아나가고 있었고, 삼대의 사람들 역시 그러했던 걸로 기억합니다.